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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묻는 나그네>의 세상이야기

슬픈 사랑 '화순옹주'

peter홍 2025. 9. 16. 10:50

1. 조선 영조의 2녀. 화억옹주와 효장세자의 친여동생이 된다.

 

2. 생애

1725년(영조 1) 2월 18일, 6세의 나이로 '화순옹주'로 책봉된다.

아버지인 영조가 아직 '연잉군'일 때, 정빈 이씨가 창의궁에서 낳은 자식으로,

정빈 이씨는 옹주가 태어난 이듬해에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동복형제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정빈 이씨의 자식들 중 화순옹주가 가장 오래 살았으며,

언니 향염이 화억옹주로 추증되기 전까지 사실상 영조의 서장녀로 대접받았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효장세자'가 죽을 즈음에 옹주가 홍진 및 하혈 증세를 보인 적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는 효장세자를 독살했다고 추정되는 궁녀 '순정'이 벌인 일로 보이는데,

다행히 옹주는 무사히 성년이 되어 관례를 치르고 이조판서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과 혼인한다.

죽을 때 까지 슬하의 자녀가 없었고, 김한신은 첩에게서 아이를 보았던 것을 볼 때

화순옹주가 음독으로 하혈하면서 불임이 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그런데 월성위 김한신이 갑자기 병으로 죽자 충격을 받은 화순옹주는

7일 동안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가려고 시도했다.

이에 걱정이 된 영조는 직접 화순옹주 집에 거둥하여 딸을 위로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옹주는 부왕의 간곡한 설득에 약을 먹어보려고는 했으나 "차마 목에 내려가지 않는다"며

곧 전부 토하고 말았고, 열흘동안 아무 것도 못 먹은 결과 끝내 사망하고 만다.

남편이 떠난지 13일 만에 뒤를 따른 것이다.

예조판서 '이익정'은 옹주를 열녀로 정려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영조는 따르지 않았고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굶어서 죽었으니,

효(孝)에는 모자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정조 대에 이르러서야 열녀문이 내려졌다.

영조의 이런 반응에 대해 당시 화완옹주 역시 과부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부담을 가질까 염려했다는 추측이 있다.

 

화순옹주와 남편 김한신의 무덤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으며,

이곳에는 그녀의 열녀문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유형문화재 제45호)이 있다.

이곳이 바로 추사 김정희의 본가다.

일각에서는 화순옹주가 자살한 이유로 열녀 이데올로기보다는 그녀의 외로웠던 인생사를 연관시킨다.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 언니, 오빠를 다 잃고 다른 후궁을 들이고

그들에게서 여러 자식을 낳는 아버지와 겉만 화려한 왕궁을 보며

홀홀단신같은 고독한 느낌 속에 성장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러다 혼인하여 출가한 이후 남편 김한신과는 금슬이 좋았으나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남편마저 잃게 되자, 다시 허무감 속에 남은 여생을 보내느니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화순옹주홍문이 있다.

정조가 화순옹주의 정절을 가리면서 정려각과 열녀문을 세웠다.

이곳에는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합장묘, 김정희묘와 고택이 있다.

충남 예산의 용궁리에 전해지는 설화로 화순옹주 내외의 비극과

왕자지의 비화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화순옹주는 자수를 아주 잘 놓았는데, 하루는 아버지의 곤룡포를 만들었다.

옹주는 곤룡포를 완성한 뒤에 어떤지 품을 보려고 남편 김한신에게 입어보게 하였다.

그런데 김한신이 임금만이 입는 곤룡포를 입은 모습을 본 사도세자가 격분하여

옆에 있던 벼루를 들어 김한신을 내리쳤다. 이로 인해 김한신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옹주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과 사도세자에 대한 원망을 품고 굶어죽은 것으로,

영조는 그들을 위로하고자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기로 했다.

그런데 명당이라는 용산 앵무봉 아래에 장사 지내려고 땅을 파니 물이 콸콸콸 쏟아졌다.

당연히 묫자리로 쓸 수 없었는데 김한신 집안에서

이 자리가 3대에 걸쳐 판서가 나올 자리라고 고집하여 200자 떨어진 곳의 땅을 다시 팠다.

다행히 물이 빠져나가 명당에 화순옹주의 묘를 쓸 수 있었고,

연못이 생긴 자리는 왕자지(王子池)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지역에 전해진다.

왕자지 연못은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은 볼 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