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더 칼리스타 Panther Kallista

팬더 칼리스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올드카

'Panther Kallista' 전국 Tour

팬더 칼리스타 이야기

<펌> 비운의 명차 --또 다른 시각으로 본

peter홍 2005. 11. 26. 19:04

 

 

비운의 명차 :

   

                   (국산) 쌍용 칼리스타 

 

 

 

  
 이 차량은 생긴 모습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외형을 자랑한다.

19세기말 또는 20세기 초의 클래식카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이 보는 이로 하여금

 "타보고 싶어......"라고 말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차의 진가는 저런 멋진 외향만이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오로지 스쿠프 터보만이 도달 가능하던 마의 200벽 (지금은 200정도 넘기는 국산차도 많았지만 저 시대의 평균은 180km도 도달하지 못했다.) 을 뛰어넘을 수 있었으며 0~100km/h까지의 가속력은 8.45초에 달하는 지금봐도 만만찮은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능으로도 판매량은 극소수, 자동차 매니아로 하여금

 "저주받은 명차"라는 탄식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 모델의 파란 만장한 생은 제조사의 매출 부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개발사였던 팬더는 당시 극심한 "영국병"에 시달리고 있던 다른 제조업과 함께

자금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 차량의 개발 단계였던 81년 한국의 진도그룹에 매각되어 "리머"라는 개발 명칭 대신 그리스어로 '귀엽다'라는 뜻의 칼리스타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진도그룹 역시 마케팅 능력의 부재를 여실이 드러내며 대량 판매에 실패,

결국 87년 쌍용으로 경영권을 넘겨주고 만다. 이리하여 쌍용이 생산하게 되었는데.......

당시 쌍용의 마케팅 기획은 연간 300대의 소량 생산을 하여 150대를 해외에 수출하고

150대를 국내에 판매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케팅 기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일단 제대로 국제 무대에 알려진 회사가 아닌 쌍용이라는 회사가 만든 스포츠카를 사 줄 시장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의 절반 이상은 내수가 아닌 수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93년부터 생산하여 97년 생산 종료할 때 까지 생산한 차량 숫자는 모두 합쳐 78대(!)에 불과했으며 특히 내수시장에는 겨우 28대만이 판매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에서 4000만원이 넘는 가격의 차량은 국산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BMW나 벤츠등의 구매도 가능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쌍용의 마케팅 능력은 의심이 된다.(이런 고질병은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는 정말 매혹적이다.

본인이 단 한번 이 차를 몰아봤을 뿐인데, 이 차의 코너웍은 정말 발군이다.

정확히 코너를 감아드는 머리와 출렁거리지 않는 엉덩이는 이 차의 성격을 극명히 드러내준다.

 

밀양-언양간을 잇는 가지산 구간에서의 운전은

그 일대 운전자에게는 악명높은 험로로서 14km도 안 되는 짧은 구간에도 불구하고

평균 통과시간이 21분이 넘는다는 것으로 어느정도의 험한 길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비포장도로가 아니고 직선화가 이루어진 지금에도 20분 이상이 걸린다. 당시 저 차량을 운전했던 시점에서는 직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어핀 구간과 짧은 직선구간이 계속 반복되는 저 도로의 상황에서 당시 옆에 같이 달렸던

티뷰론 튜닝카는 전혀 자신의 마력을 써 볼 기회가 없었으나 이 차량은 충실한 엔진 반응과

기민한 브레이크, 그리고 섬세한 서스펜션의 조화로 별다른 어려운 없이 쉽게 돌아나올수 있었고 실제로 그것은 구간통과 시간에 영향을 미쳐 전체 주행시간은 겨우 8분대에 그치는 위업을 이루어냈다.
밤길의 헤어핀을 언더스티어나 오버스티어 없이 질주했던 칼리스타의 주행은 아직도 머리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언젠가 타 본 지인의 포르쉐 박스터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진정코 국산 명작 스포츠카의 최고봉이라 말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장상황에 의해 꽃피우지 못한 칼리스타에게 비운의 명작 1번의 넘버를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