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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다 이민이야기

이민(移民) 이야기 -- 카나다 이민기(移民記) 1

peter홍 2005. 11. 10.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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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너무도 광범위한 이야기속에서

뭐라고 꼭 짚어서 이야기 할 수 는 없지만

"이민"이라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이민을 생각하시는 분. 유학을 생각하시는 분.

아니면 아이들 교육때문에 이민을 생각하시는 분들의 생각은 어떠할지.....

 

나는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 광풍처럼 몰아친

"투자이민" 열병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그 당시 처음에는 호주 이민 바람이 불었는데,

나혼자 몰래 세미나를 너댓번 갔다와도 뭔가 헛바람만 잔뜩 주입시켜 주는

그 세미나에 염증을 느꼈는지 답사가는 길의 호위로 호흥은 해 주었습니다.

호주로 지인들과 6명 부부 즉, 12명이서 호주 이민 답사를 일주일간 다녀왔습니다...



대륙섬이고, 너무 광활하고..... 영어 사투리를 쓴다는 점 때문에

호주 이민을 포기하고

1994년도에 <남미 이주공사>에서 모집하는 세미나에 도 참석해 보고는

카나다로 답사겸 여행을 큰 동서와 함께 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아이들을 유학을 보낼까?하고 유학원에도 다녀보고

그 당시 조선 호텔에서 하는 이민 세미나를 5번 이상 다녀봤는데도

이민에 대하여 좀처럼 실체가 잡히지를 않고

허황된 꿈들만 잔뜩 나열하는것 같아서 

이민 답사 여행을 다녀오게 된 것이였습니다.

양쪽을 다 다녀보니

그 실체가 조금이나마 잡히는 것같아 많은 고민을 했으나,

내가 이민가려는 목적은

영구히 살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교육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이제까지 너무 많은 고생을 했으니 조금 쉬어가면서 생활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이민 생각을 하게 된것이니 만큼.

우선을 아이들의 교육에 두기로 하고 고민을 하였으나,

그 당시 우리 가족들이 하던 사업이 너무 바빠서 정말 많은 고민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우리 부부는

여성 의류의 제조, 판매업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1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xxx에서  점포까지 운영하고 있어서 밤에도 잠을 못자고

낮과 밤이 뒤섞인 생활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우리 부부도 지치기도 하였거니와

그런 환경때문에 아이들 교육 문제에는

더더욱 신경을 써줄 수 없거나  형편이 못되던 시기였던것 같습니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를 3번이나 전학을 다녔으며

중학교에 가서는 8학군인 반포동에서 학교를 다녔었기에

학습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과외도 시켜봤지만, 

소용이 없고..... 학급에서 맨 하위권을 맴 돌았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로서 자식 교육문제에 무지한 내 자신을 탓하게 되었고

또, 내 환경을 탓하게도 되였습니다.

큰 아들 본인으로서도 공부가 맘대로 안되고 학급 석차를 따라가려 얘쓰는 눈치였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있는 상태였기에 공부가 마음대로 잘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큰 아들이 중 2학년에 올라간  어느날 아침에 보니.......... 

큰 아들이 내가 사 준적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25단 자전거인데, 그 당시 삼풍백화점에서 가격을 물어보니

35만원 정도하는 아주 비싼 고급 자전거 였는데 큰 아들이 타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여

그 날 저녁에 큰아들을 앉혀놓고 물어보았더니.....

참 어쳐구니 없는 대답이 돌아 왔다.

자기 학급에 아파트를 돌아 다니며 자전거를 훔쳐서 자기 반 얘들한테 파는 아이가 있는데

우리 큰 아들보고 3만원에 사라고 해서 어쩔수 없이 샀다는 것이였습니다.

안 사면 때린다고 하면서 울먹이는 것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여기서 내가 아들을 잘못키우면 도둑놈 밖에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고민이 되어 얘들 학교에는 면담조차 가보지 않은 내가

그 다음날 무작정 학교로 큰 아이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큰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젊은 남자 선생님이였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지는 몰랐다며 주의를 시키겠다" 는 말과 함께.....

"웬만하면 유학을 생각해 보심이 어떤지요?" 하는것이 아닌가요?

교무실에서의 틀에 박힌 대화인 만큼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속으로만......

" 아, 여기는 내 아들을 교육시킬만 한 곳이 못되는 환경이구나" 하는

맘속의 생각을 꼽씹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에 온김에 작은 아들 담임 선생님한테 인사나 하고

작은 아들 근황을 물어보려  담임 선생을 찾았더니........

35세 정도의 여자 선생이였는데 자기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턱으로 나를 치켜다 보며 "누구시죠? 어디에서 오셨죠? "하는 것이 아닌가요?

꼭 뭐를 팔러 온 사람 취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담임선생은 우리 작은 아이에 대하여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꼭 이상한 마녀마냥 횡설 수설하며 아는 것도 없이

"유학을 뭐 하러 간데요?" "여기서 공부해도 대학 잘 만 가더라...." 하는것이 아닌가?

물론 맞을 수도 있고 틀릴수도 있는데,..........

이 여자 담임선생을 만나본것을 곧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갔다와서는

참으로 참담한 심정으로 그날  저녁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오늘 학교에서 보고 느낀것은

 지금은 1993년도인데 학교시설은 60년대 시설이고,

 선생들은 70년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94년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더라" 라고 이야기 하였더니

작은 아들은 자기 담임 선생이 학교에서 별명이 "마녀" 라며

이야기를 덧붙이며 자기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이였습니다.


자기들은 슈퍼마켓에서 물건 훔쳐갖고 나오는 유행이 있다며

그 실체를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요...........

작은 아들은 친구들과 몇번.....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친구 셋이서 번갈아 가며 동네 슈퍼앞에 가서.............

둘이는 밖에서 망을 보며 시간을 재고  한녀석은

"앞으로 1분안에 내가   가나 쪼코렡 3개를 훔쳐 가지고 나온다"고 약속을 하고는

그 슈퍼에 들어가서 그 시간안에 훔쳐가지고  나오고 

만약에 그시간에 훔쳐가지고 나오지 못하면

꿀밤을 때리거나 용돈으로 군것질을 시켜주거나 하는

게임같은 일종의 놀이겸 도둑질이였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놀이가 있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고

그자리에서

"도둑질을 하면 잡혀서 경찰서에 가고 전과자가 되어 평생 씻을 수 없는

도둑놈이 된다" 고 누누히 이야기 하였지만,

이제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아이들이 이해하지를 못하는것 같았습니다. 

 

나는 정말 그 날이후로 많은 충격을 받았고

미국 뉴져지주에 있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 유학쪽으로도 알아봐 달라" 는 부탁을 함과 동시에

이민을 맘속으로 굳히면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 늦은 결정인 동시에 화급하게 일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도둑질을 하다니......

학교 잘 다니며 공부는  잘 못해도 착실한줄  알았는데 너무 충격적이였습니다.

한달여  정도 지나니 미국의 여동생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뉴져지에 사립 고등학교를 3군데 면담 신청을 해두었으니

빨리 미국으로 들어 오라는 전갈이였습니다.

아내의 친구가 아들 딸들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유학을 보내는 이가 있어

우리도 그들을 따라 같이 미국에를 한번 가보기로 하고

1994년 봄  아이들이 새학기를 맞자마자 아이들을 결석을 시키고

아이들과 함께 전가족이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미국에서 5번째 안에 드는 정말 좋은 사립학교를 방문하게 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