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은 명나라의 만력 연간에 이름난 통역관이었다.
언젠가 명나라의 서울 연경에 틀어갔을 때, 창관(娼館)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그곳 여인들에겐 자기 용모에 따라 몸값이 매겨져 있었다. 그중에 천 금을 매긴 여인이 있었다.
홍순언은 그 여인을 불렀다. 방년 십육 세로 매우 뛰어난 미인이었다.
여인은 홍순언을 마주 대하고 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소녀가 몸값을 높이 매긴 까닭은 이 세상에는 째째한 남자들이 많아서
감히 소녀에게 천 금을 버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 믿고,
얼마 동안은 욕을 면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천하에 의기 있는 남자가 나타나 잡혀있는 소녀의 몸을
풀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소녀가 창관에 들어온 지 닷새가 지났으나
천 금을 가지고 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행히 의로운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손님은 외국 사람이라 소녀를 고국으로 데리고 갈 수 없을 것이고
소녀는 한 번 물들면 돌이킬 수 없는 몸이 될 것인즉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하며 울었다. 홍순언은 그녀를 가엾게 생각하여 창관에 들어오게 된 연유를 물었다.
여인이 말하기를 「소녀는 남경의 호부시랑 아무개의 딸이었습니다. 중한 벌금형을 받은
아버님을 구하기 위하여 소녀가 스스로 이 몸을 창관에 팔았습니다」하였다. 홍순언은 크게 놀라 몸값이 얼마인지를 물으니 이천 금이라 했다.
흥순언이 이를 갚아 주고 나왔다.
여인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감사의 절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이후 홍순언은 그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몇 해 후에 다시 중국 연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길가에서 홍순언이 들어오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다.
연경 가까이 이르자 길 왼편에 휘장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무리가 홍순언을 맞이하면서
「병부, 석 장관께서 환영하십니다」하고는 곧 홍을 관저로 인도했다.
석 장관이 나와서「장인 어른, 따님이 아버님을 기다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면서 홍의 손을 잡고 내실로 인도하였다. 그의 부인은 성장을 하고 마루 밑에서
큰절을 하는 것이었다. 홍은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석 장관은 웃으면서 「장인 어른께서 따님을 벌써 잊으셨습니까」한다.
홍은 그제야 비로소 그 부인이 지난 날 창관에서 풀어 준 여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창관에서 풀려 나와 곧 석 성이란 사람의 후실이되었다.
석 성이 후에 높은 벼슬에 올라 귀부인이 되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손수 비단을 짜되,
보은(報恩)이라는 두 글자를 무늬로 수놓았다 홍이 귀국하려 할 때,
그녀는 손수 짠 보은단(報恩緞) 외에도 많은 비단과 금은 등을 듬뿍 행장 안에 넣어 주었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석이 병부 장관으로 있으변서 명나라 군사의 출병을 주도하였다.
이는 모두 병부의 석 성이 조선 사람을 의롭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느낀 바가 있어 이 이야기를 적는다.
-열하일기/옥갑야화(玉匣夜話)-에서 * 당성군 홍순원(唐城君 洪純彦) : 작자의 의중 인물 * 석 성(石星) . 작품속의 상상적인 인물 * 緞(비단 단)
* 번역문은 사단법인 국민독서문화진흥회에서 편찬한 [고전읽기독본]에서 옮겨 실었음.
◀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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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언은 젊었을 때 불우했지만 의기가 넘쳤다. 언젠가 연경에 갔을 때
통주(通州) 청루(靑樓)에서 놀다가, 자태가 아리따운 여인을 보고 반하여
하룻밤 인연을 맺고자 했다. 소복 차림인 이 여인을 보고 연유를 묻자 여자가 말했다.
“저는 본래 남쪽 절강(浙江)이 고향입니다. 서울[京師]에서 벼슬을 하던
부모님이 불행히도 염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는데, 객사에 모셔둔 부모님의 영구를
고향으로 이장할 돈이 없어 부득이 제 몸을 팔러 나온것 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목매어 울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순언이 불쌍히 여겨 장사지낼 비용을 물으니,
300금이면 된다고 하므로 전대를 툭툭 털어주고 끝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순언의 성명을 묻는 여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여인이 말했다.
“대인(大人)께서 성명을 말씀해주지 않는다면 첩 또한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성만 알려주고 나오자 일행들이 그의 오활함을 비웃었다.
훗날 여인은 예부시랑(禮部侍郞) 석성의 계실(繼室)이 되었고,
석성은 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사 조선 사신[東使]를 볼 적마다
홍 통관[通官]이 왔는지를 꼭 물었다고 한다.
『 통문관지 (通文館志) 』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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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통역관 임란 때 명明의 석성 만나 4만 대군 지원받아
.선조 22년(1589년). 일본의 침략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거세게 밀어 닥칠 때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야할 판이다. 그 후 선조 25년(1592년) 일본은 15만 대군으로 조선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 했다. 이 해 4월 왜군 제 1군은 부산, 밀양, 대구, 문경을 거쳐 충주로---. 제 2군은 울산 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 1군과 합류해서 서울로 진격한다. 제 3군은 김해에서 추풍령을 거쳐 질풍노도 疾風怒濤처럼 북진을 거듭한다.
거듭된 왜구의 침략으로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은 조정에서는 서울 이남이 초토화 되자 피난을 서두른다. 선조는 조정대신들과 함께 풍전등화와 같은 국운을 한탄하며 서울을 떠나 개성과 평양으로 피신하고 두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와 강원도로 각각 피난을 하는 비운을 맞는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조정에서는 국난극복을 위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서울은 왜구의 발아래 궁궐이 불타는 등 혼란이 극도에 이른다. 이 해 5월 초 왜군은 진격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서울을 함락한다. 전세가 양양한 왜군은 다시 2군으로 나눠 고니시는 평안도를---. 그리고 가또오는 함경도로 각각 진격한다.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설상가상으로 함경도 회령에서는 두 왕자마저 왜군에 붙잡히는 비운을 맞는다. 조국강토는 폐허가 되어 쑥대밭으로 변한다. 백성들은 수탈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등 망국의 비탄에 잠긴다.
이 때 남해안에서는 전라 좌수사左水使 이순신의 승전보가 전해지면서 전세가 역전을 거듭한다. 우리 해군은 남해안 옥포, 사천, 당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시킨다. 한편 이 낭보와 함께 육지에서는 민간인의 거병擧兵과 의병義兵으로 전세를 결집해서 해상에서 대패大敗한 왜군의 퇴로를 차단 추격하면서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을 거듭한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미 이 강토를 점령한 십 수만 여의 왜군과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구원병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고 있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명나라에서도 조선의 지원군 파병으로 찬반의견이 분분紛紛하던 터였다. 며칠을 두고 가부양론으로 격론이 거듭되었으나 마침 홍순언 통역관의 양부養父인 석성石星이 주무 장관인 병부상서兵部尙書(국방부 장관)로 있던 참이라 극적으로 파병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명나라 이여송이 이끈 4만 대군이 평양을 점령한 왜군을 격퇴한다. 우군은 마침내 서울을 탈환하지만 일진일퇴의 치열한 격전을 벌인다. 왜군은 선조 29년(1593년) 4월 경남 서생포 전선까지 퇴각해서 휴전에 들어간다.
#.당릉군 홍순언 통역관은 야욕에 찬 왜구倭寇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또다시 명나라에 파견된다. 막연하나마 몇 차례 명나라를 들락거린 인연과 뚝심하나로 방문한다. 때 마침 이번엔 석성이 천만다행으로 병부상서의 중책을 맡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처럼 국운도 기구한 길목에서 조그만 인연의 실마리가 구국의 큰 밧줄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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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라도 이 세상에 출생한 순간부터 인연(因緣)을 맺으며 살아간다. 우선 최초의 인연은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일 테고 형제 친·인척도 그 범주에 속한다.
다음으론 학교와 직장, 그리고 사회 등지서 맺은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도 모두가 인연이다. 그런데 인연에는 좋은 인연(善緣)이 있는 반면 악연(惡緣)도 있다.
선연의 대표적인 경우는 지금부터 소개할 조선의 제 14대 왕 선조 시대 역관 홍순언(洪純彦)과 중국여인 류씨와의 실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대신에 악연은 여전히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에 어쩌면 견원지간인 우리와 일본의 관계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
오랜 기간 방송되었던 '역사스페셜'이 종영되고 그제(6월 16일)부터 첫 방송을 시작한 KBS -1 TV의 <한국사 傳 - 인연,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 - 역관 홍순언 편>에서 바로 선연의 실체를 발견하고 느낀 바 적지 않았기에 펜을 들었다.
조선왕조 창업의 기틀을 세운 지도 20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조선의 어떤 숙원사업으로 남아있던 것이 종계변무(宗系辨誣)였다. 이는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 간 명(明)나라에 잘못 기록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종계(宗系)를 개록(改錄)해 줄 것을 주청한 사건인데 당시 명나라의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때의 이성계 정적이었던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이성계를 그의 아들이라 한 것은 조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었기에 그의 자손인 선조 또한 반드시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조선과 명나라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로까지 부각되었다.
하여 태조 때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고쳐줄 것을 요구했으나 시정 약속만 하고 실현되지 못하여 이는 조선 역대 왕들의 가장 큰 현안문제가 되어왔다. 그같이 중차대한 난제를 해결했음은 물론이며 임진왜란의 난세까지도 슬기롭게 헤쳐 간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순언이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어떤 아름다운 인연과 그 인연에서 기인한 보은의 결실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록과 인구에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종계변무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몰린 역관 홍순언은 중국으로 들어간다.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지난날 북경의 어느 기생집에서 만났던 여인 류씨였다.
역관(譯官) 홍순언은 중국말도 능숙할뿐더러 학식도 풍부하고 외교 수완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또한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여 그 나라의 인심과 풍습도 잘 아는 외교관 겸 국제 장사꾼이었다.
홍순언이 어느 해에도 또 다시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의 장안에 가게 되었다. 홍 역관이 하루는 장안의 술집(妓館)에 가게 되었는데 접대하는 여자가 들어섰다. 근데 소복을 입은 젊디 젊은 그 여인은 용모도 고왔지만 보면 볼수록 행동거지 역시도 고상하고 예의범절이 보통이 아니었다.
홍 역관이 조심스럽게 수심이 깊은 그 여자를 대하면서 거듭해서 물으니 그 여인은 그제야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죄를 얻어 처형된 병부상서의 딸이었단다. 근데 돈이 없음에 부친의 시체를 고향으로 모시고 가 치상(治喪)하기 위해 몸을 팔게 되었다고 했다.
이에 원래 천성적으로 정의감과 동정심이 강했던 홍 역관은 그 사연을 듣고 이 가련한 여자를 구해 주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술집 주인에게 대신 빚을 청산해 주고 그 여자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었다.
홍 역관이 거금을 들여 그 여인을 구해 주니 주위에서는 이상한 눈빛으로 보았으나 홍 역관은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그같이 크나큰 고마움에 대해 그 여자가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그 뒤 그 여인의 신분은 수직상승했고 그 여인은 보은의 의미로서 종계변무의 막중한 책무의 해결까지 홍순언에게 선물로 주었음은 물론이다.
그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일본의 침공을 당하게 된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의 구원병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 때도 나서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순언이었으며 그러한 도움의 배후엔 역시나 과거 좋은 인연을 맺었던 여인 류씨와 그녀가 재혼하여 남편이 된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석성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군사를 내주고 조선의 구원병으로 파견하여 누란에 처한 조선의 왜란을 막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역관 홍순언에 대한 기록과 이야기는 선조실록과 성호사설, 열하일기에도 등장하는 등 그 책만 30권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어쩌면 에고이즘이 고착화된 사회서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은혜를 보은하기보다는 은혜를 도리어 원수로 갚는 기가 막힌 경우도 종종 보는 중이다.
하지만 역시나 좋은 인연만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법임을 <한국사 傳 - 인연,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 - 역관 홍순언 편>에서 다시금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런 걸 보자면 개인이든 외교든 간에 여하튼 좋은 인연을 맺는 게 끝도 좋은 법이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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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역관 홍순언 선생의 미담(우국충정님의 글 퍼옴) |
조선 중기에는 홍순언(洪純彦)이라는 분이 계셨다. 그는 역관으로 명종때 여러번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다. 한번은 그가 북경(北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중국 통역관이 조선사신 일행을 홍등가로 안내하며, "이곳에서 하룻밤을 묶고가십시오."라 하니, 홍순언은 그 중 해어화채(解語花債, 기생들의 재주에 따라 매긴 몸값)가 가장 높은 기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방의 기녀는 15~16세 가량 된 소녀로, 소복을 하고 울고 있었다. 홍순언이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자신은 16세로 남경의 호부시랑 류모(柳某)의 딸인데, 부친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고 모친또한 홧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장례비용이 없어 기녀가 되었는데. 돈몇푼으로 잘난척하는 소인배같은 남자들로부터 잠시나마 몸을 보전하고자 해어화채를 비싸게 매겼던 것이요, 이제 당신은 외국인이니 한번 정을주면 따라갈수 있겠는가." 고 하자, 놀란 홍순언은 무릎꿇고 그녀에게 대죄하면서 "소국(小國)의 미관이 상국(上國)의 재상가의 딸을 욕보이랴." 하며 그날밤을 아무일 없이 보낸후, 자신이 가져온 인삼을 팔아 마련한돈 은2천냥을 선뜻 내놓아,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 소녀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이름을 물었으나, 홍순언은 조선의 역관이라고만 대답했을 뿐이었다. 이조의 역관들은 유일하게 개인무역이 나라에서 허용된 존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을 통해 인삼과 은을 중국에 수출하였고, 반대로 중국으로부터는 그들을 통해서 비단과 아라비아산 향료를 수입해왔다. 동료 역관들은 이를 두고 비웃음감으로 삼았다. 도리어 외국에서 큰 돈을 썼다는 죄로 탄핵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홍순언은 이에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에서 편찬한 백과서적인 대명회통(大明會通)에 의하면, 태조이성계(太祖李成桂)의 아버지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닌, 고려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 조정에서는 태종 이후로, 수십차례에 걸쳐 사신(종계변무사)을 명나라에 보내어 백과서적의 내용을 정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명나라측에서는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 번번히 거절하였다. 선조 21년인 1588년 정사 황정욱이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을 때, 중국측에서는 이때에도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듦을 들어 조선사신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때, 예부상서(지금의 외교부 문광부장관)였던 석성(石星)이 홍역관이라는 분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해와, 조선 조정에서는 홍순언을 풀어주어, 바로 중국으로 보냈다. 홍순언이 명나라 북경에 도착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와서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중국의 예부상서였던 석성이 큰절을 하며 "장인어른 절받으십시오"라 하기에 홍순언이 당황해하는데 이때 석성의 부인이 나와 홍순언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 소녀는 다름아닌 홍순언이 여러해 전에 기방에서 속환해준 그 류씨소녀였다.
부모의 장례를 치루고 빚을 갚은 류씨소녀는 낙향하려고, 부친의 친구였던 병부시랑 석성의 집에 인사차 들리게 되었다. 석성 시랑 또한 류모 상서가 누명을 썼음을 알고, 소녀를 자신의 딸처럼 돌봐주었다. 마침 석시랑의 부인은 와병중이었는데, 류씨소녀는 지극정성으로 부인을 간병했으나 부인은 별 차도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류씨소녀의 정성에 감탄한 석시랑은 류씨를 후실로 맞이하였다. 그녀는 매일 밤마다 비단을 한필씩 직접 수놓았는데, 비단에는 보은(報恩)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고, 어느덧 그녀가 수놓은 비단은 100필이 되었다. 류씨부인은 남편에게 예전에 왔던 역관의 이름을 물어보아서 알게 되었다. 부인에게서 사연을 들은 석성 또한 동방에도 의인(義人:의로운 사람, 요즘의 의인의 기준은 또 무엇인지...)이 있었다고 탄식하였다. 석상서 일행에 의해 환대를 받은 홍순언 역관은 결국 목표인 종계변무에 성공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백과서적을 담당하던 부서는 다름아닌 예부였고, 그 예부의 우두머리인 상서가 바로 석성이었다.
사신 일행이 떠날 때 즈음, 류씨부인은 손수 짠 비단 100필을 홍순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홍순언은 이는 이익을 챙기기 위한 일이 아니라 하며, 비단을 받지 않고 떠나왔다. 압록강에 도착하자, 류씨부인은 먼저 하인들을 데리고 압록강에 도착해 있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데, 어떻게 사람이 되어 은혜를 잊는단 말입니까?"
부인의 눈물어린 호소에, 홍순언은 마지못해 비단을 선물받고 되돌아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종계변무에 성공한 공이 있는 신하들을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록하였고, 이때 홍순언은 광국공신 2등훈에 녹훈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문무관 품계) 행병조참판(行兵曹參判)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당릉군(唐綾君)으로 개봉(다시 봉해짐)되었다.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져, 조정이 의주(義州)까지 몽양(蒙養=피난)가게 되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에 청병사신(=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이번에도 홍순언이 오도록 청하였고, 그는 청병사신으로 명나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조선조정의 대신들은 홍순언에게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싸주며, 뇌물을 바칠 것을 주문하였으나, "어찌 신뢰로써 사귀지 못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뇌물을 쓰느냐!"며 대신들을 질타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자, 명나라 조정의 대신들은 조선이 왜와 짜고, 명나라를 침략하려는 계획이라 하며 모두 파병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홍순언을 보고 조선의 의리를 믿었던 석성에 의해, 파병이 결정되었다. 당시 석성은 병부상서(국방부장관급)로 부임해 있었다. 위태로운 때에 강남(중국 남부)의 부대 5만을 조선에 급히 파병하여, 조선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598년 선조 30년 7년간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 일로 병력을 소모하여, 훗날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1636년 결국 망하게 된다. 명나라 조정은 석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 석성의 문인은 조선조정에 스승을 구원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당론이 나뉘어 서로 싸우기에 바빴고, 구국의 은인이었던 석성은 결국 옥사하였다. 석성이 죽으면서 아내 류씨와 두 아들에게, 조선으로 가도록 하여 해주(海州) 수양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홍순언은 선조때에 사망하였는데, 사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당릉부원군(唐綾府院君)으로 추증되고, 명나라에서도 그의 충정을 기려 은청광록대부에 추서하였다. 그의 손자 효손(孝遜)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홍순언이 살던 곳은 훗날 미장동(美匠洞), 혹은 보은단동(報恩緞洞)으로 불렸는데, 이는 그가 비단을 담장에 걸어놓은 것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그가 자신의 집 담장에 孝悌忠信의 네 자를 새겼던 것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지금의 을지로 주변이다.
한사람의 관리가 마음을 바로 쓴 것이 나라를 빛냄은 물론이요. 본인 또한 역관으로는 1품 벼슬에 올라 부원군까지 봉해졌으니 영광된 일이다. 그의 곧은 마음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위기에서 구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일이기는 하나 현세의 공직자들이 본받고 배울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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