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난 후에 맑게 개인 푸른 하늘.
정말 오래간만이다. 좋은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참 명랑하게 쾌활하게 하는 것 같다.
일요일이지만,
집에만 있을수 없어 파주에 있는 회원의 자동차 <카페 리타Lita>로 향했다.
나도야님과 만나서 임진강변에 위치한 조금마한 펜션에 가보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다.
밖에서 구경만 하기로 하고 ....
맑고 파란 하늘 . 파주군 월롱면 도내리에 있는 자동차 카페 리타Lita 전경. 이곳에서 따뜻한 원두커피를 한잔 마시고.....
5년이 넘어 10만 킬로를 넘게 주행한 쏘렌토가 말썽을 피워 새로 장만한 현대의 베라크루즈 검정색.
이제 그 몇년동안을 나와 우리 가족의 신발 역활을 하여 줄 쏘렌토의 사촌 동생. 현대자동차의 베라크루즈
맑은 하늘과 영국의 빨간2층 버스의 조화를 자동차 카페 리타Lita
주인장인 나도야님의 애마 1960년형 캐딜락의 물세차.
아는 知人의 소개로 전곡에 있는 전원주택을 구경하러 가는 길의 멋진 풍경. 여기는 外國이 아닐까?
지방도로를 다니다가 가끔 만나는 약수터. 시원한 한모금의 약수물이 나그네의 목을 시원하게 한다.
고풍스러운 숭의전崇義殿 올라가는 길.
숭의전 안채.
마당 임진강가에 있는 600여년 된 느티나무의 웅장한 모습. 옛 조선의 기개를 보는듯하다.
어즈버 세월은 유수와 같고, 어느새 인걸은 간곳 없고 남은 흔적이란.......그림자 뿐인가 하노라.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카페 Lita의 주인장
떠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일 벌리기 좋아하는 말썽꾼 피터홍. 아, 나는 김삿갓을 닮았나봐?
숭의전에서 내려오는 길. 록음이 우거진 고풍스러운 길을 걷고 있노라면......마음의 평정을 이룬다.
밤나무의 밤꽃은 짙은 향기를 뿜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한바퀴 휘돌아 오는 길가에 참외파는 젊은 새악씨. 350여평에 심은 맛있는 노란 참외가 익어가고 있었다.
어린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외할머니댁에 가는 길에 원두막이 있어 그 참외밭에서 걸음을 멈추었던 기억.
노오란 참외가 익어 가는 계절이 온것이다. 이제는 여름이어라.
신라의 마지막 비운의 왕인 경순왕의 왕릉을 찾아 들었다.
제56대 경순왕(敬順王 927~935 재위기간 8년 )
경순왕<敬順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부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 태후이다. 부는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전 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원년 11월, 왕의 아버지를 신흥대왕,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에 침입하여, 논밭에 있던 노적가리를 모두 불태웠다.
2년 봄 정월, 고려 장수 김 상이 초팔성의 도적 흥종과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여름 5월, 강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게 하자, 태조가 명지성의 장군 왕 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내게 하였다. 견훤이 대야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보내 대목군의 벼를 베어 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년 여름 6월, 천축국의 삼장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을 공격하므로, 고려 장수 홍술이 그들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 봄 정월,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후하게 예우하고 상보라고 불렀다.
예전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가 항복해오자
태조가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참작하여 은총을 베풀고 표창하였다.
태조는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향하에 있던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왕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동해 주변에 있는 주와 군의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5년 봄 2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근방에 와서 왕을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은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 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종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동시에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을 주었다.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 시랑 김 불, 부사로 사빈경 이 유를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 후당 명종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을 주었다.
8년 가을 9월, 남극성이 나타났다.
운주 경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9년 겨울 10월,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로 되어,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였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왕자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 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 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여,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개칭하여 경주라 하고, 이를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자를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나의 백부 잡간 억렴이 지대야군사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행이 훌륭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외에는 집안을 받들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곧 현종의 아버지로서, 후에 안종으로 추봉되었다.
경종 헌화대왕 때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으로 봉하였다.
공이 송 나라 흥국 4년 무인에 붕어하니, 호를 경순[효애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신라 시조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니, 초대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상대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라 하고,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라고 하였다.
경순왕릉은 그 규모가 우선 작고 초라하다. 일요일인데도 관람객은 없었다. 한가한 주차장 모습
어설픈 모습의 왕릉 올라가는 길.
왕릉밑에있는 비각과 재실. 작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백성들을 생각하는 어진 임금이었던 경순왕.
오랜 세월의 경순왕 추모비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안고 있는 비석.총탄 자국이 보인다.
허물어지고 깨지고....보수가 안된 모습은 애처롭기 까지 하다. 비운의 왕이랴..........
고랑포구
우리의 산하는 푸르렀다. 논에는 벌써 새파란 벼가 잘 자라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강변북로에서 바라다 여의도 빌딩숲
돌아 오는 길은 나도야님이 운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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