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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摩山房(천마산방)

미당 '서정주' / 고창 시 문학관

peter홍 2024. 9. 21. 23:54

9월 20일은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이미 예정되어 있던 고창 선운사 "꽃무릇 축제"에 가기 위하여

妻兄을 비롯하여 妻弟들과 동서. 등 필자까지 6명이 함께

고창 禪雲寺 근처의 펜션에 도착한 것이 3시경이었다.

 

예약된 펜션에 짐들을 내려놓고,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서 펜션 近處에 있는

"미당 서정주"의 시 문학관을 함께 訪問해 보기로 하였다.

 

高敞郡에 있는 선운사 근처에는

"인촌 김성수""미당 서정주"의 生家가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고창 지방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人物들이 다수 輩出된 곳이다.

그러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산은 적고 穀食을 재배할 수 있는 밭들이 많은데, 

그 土質 또한 질 좋은 "황토 흙"이라는 사실들이다.

질 좋은 황토 밭에서 나는 곡식들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有名한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個人的인 생각일 뿐이다.

 

 

 

서정주 시인이 다니던 초등학교 分校를 改造하여

'서정주 시 문학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의문이 있었다.

나라의 資産인 分校를 어떻게 個人의 시 문학관으로 사용할 수 있었는지?

폐분교를 문학관측이 사들여서 문학관으로 개조를 하였나 보다

 

"미당 서정주" 시인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들이 '抒情的인 詩人'으로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에 대하여는

함께 간 중년의 처제들도 잘 모르는 部分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訪問客 중에서는 芳名錄에

어처구니없게도 '존경한다'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냥 한 사람의 詩人일뿐이지

우리가 존경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에 대하여는 조금 더 알고 넘어가야 할 部分이 있는 것 같아서

처제들에게 설명을 해 주었더니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우리 국민들에게

그의 친일 행적들이 문제가 된 것이었기 때문인데,

"국화 옆에서"라는 詩 하나 때문에 우리 국민들에게 有名해지기는 하였으나

그는 그 시대를 살아온 유명한 인물이기는 하였지만, 

그 이름에 걸맞게 모든 국민들에게 추앙을 받거나

존경을 받을만한 행동을 한 인물은  절대 아닌 듯 보였다.

 

 

 

필자가 보기에도 詩人으로서의 本分이 아닌

글줄이나 쓸 줄 아는 그 알량함으로

온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선동을 하고

기회만을 엿보았던 사람이라는 인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인으로서가 아닌, 글 쓰는 사람으로서

약간은 얍샵한 기회를 찾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대를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고

 일제시대가 몇 백년은 갈 줄 알았다"는 허무 맹랑한 자기 변명들 뿐.

 

그냥 온 국민들에게

" 내가 무지해서 그 시절에 어쩔 수 없는 잘못한 행동이었다 "라고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生을 마감하였다면

온 국민들이 그를 존경하고 추앙하였을 것 같았는데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를 위한 변명만 하였을 뿐

2000년도에 김대중 정부에서 준 "금관 문화훈장"이 아까울 따름이었다.

 

이런 점들이 함께 갔던 중년의 처제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이유는

중, 고등학생 시절에도 이런 사실들을

학교에서 안 가르쳐 주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이곳 시 문학관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면서

참으로 씁쓸해 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A0%95%EC%A3%BC

 

 

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2000년 12월 24일)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시인이며 교육자이다.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한국의 이생명파 시인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이며, 본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 궁발(窮髮), 뚝술이다.

탁월한 시적 자질과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해방 전후에 걸쳐 한국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및 반인륜 행적과 신군부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역사적 평가에 있어 논란의 대상이다.

 

 

 

"서정주"와 "김성수(고려대학교 설립자, 동아일보 창간자)"는 같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미당 서정주는 1915년 출생

인촌 김성수는 1891년 출생

 

 

 

 

우리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국화꽃 옆에서"를 읊은 시인 서정주와

시 문학관에 와서 알게 된 미당 서정주는

같은 인물이면서 다른 삶과 행동을 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의 詩를 좋아는 하되,

정확히 그가 어떤 삶을 살아온 인물인지는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詩人이었던 "미당 서정주"의 두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서정주의 死後에 라도

국민들이 알 수 있게 전시된 그 시절의 親日詩를 보게 된다.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게 한 친일 선동 시

작자 '달성정웅'은 서정주의 창씨개명 이름이다.

 

 

 

선동을 하는 친일시

 

 

 

서정주의 자기변명과 二重性

 

 

시 문학관을 다녀오면서

처형과 함께 처제들이 "몰랐던 사실들을 이번에 알게 되어 너무 놀랍다"면서

이구동성으로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고 처음 알게 되었다"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냥 詩는 詩로서

좋아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시인의 인성이나 살아온 내력은

우리들이 제대로 알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고.....

 

 

 

그 시절을 살아온

그 시인이 어린 시절을 살았던

그 동네의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국화 옆에서"라는 시는

그냥 저절로 읊조려 나온 시 같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잠시 쉬면서

居室을 잠시 눈을 돌려 본 필자가 놀랐던 것이 있었다.

수 십년전에 아내가 어디에서

큰 "백자 항아리"와 함께 사 온 "백자 대형접시"가 있었는데

거기에 미당의 시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집 거실에 떡하니 있었다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기는 했지만, 어찌하랴

대형 접시를 내다 버릴 수도 없고 깨서 버릴 수도 없으니

 

이것은 필시 "악연"인게야

惡緣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