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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밟으며.......

[스크랩] 11월에 떠난 가수 : 김정호.....그의 삶과 노래

peter홍 2005. 11. 28. 13:03
요절가수 김정호가 그렸던 고독한 인생의 이미지는 짙은 회색빛이었다.
비범한 재주는 신조차 질투가 솟았을까! 너무도 젊은 나이에 앗겨버린
그의 노래세상은 온통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 등으로 뒤범벅된 삶의 반영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던 결핵균들은 오히려 숨이 끊어질 듯
가슴속의 한을 토해내게 했다.


대중들은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어느 누구도 마음 깊은 곳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촉촉히
적셔대는 처연한 멜로디와 노랫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팬들을 얼어붙게한 '이름모를 소녀' '하얀나비'
그리고 젊은층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랑의 진실' '작은 새' 등은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


드라마틱하게 짧은 삶을 살다간 김정호의 등장은 가요계의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오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의 노래는 젊은 학생층의 열광적 지지를 받던 기존의 포크음악을
온 국민을 대상으로 영역을 넓히며 공감대를 형성할만큼 호소력이 강했다.
새마을운동으로 건설열기가 드높은 당시 사회에 '너무 어두운 곡'이라는 이유로
일부 배척도 있었지만 창백한 얼굴에서 뿜어나오는 처절하리만치
슬픈 멜로디는 온나라를 중독시키며 진동했다.

원로작곡가 황문평 조차 '감히 천재로 표현해도 좋다'며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김정호의 음악을 안타까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17년이 지났다.
자신의 음악이 세상에 울려퍼지는 달콤한 꿈을 꾸며 음악공부에 하얀밤을 지세우며
몰두했던 김정호. 혼을 담아 기타줄을 튕겨대며 젊음을 불사르던 모습에
음악선배들도 머리를 숙였다.

본명이 조영호인 김정호는 1952년 3월 전남 광주에서 부친 조재영과 모친 박숙자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여수경찰서장을 지내고 출판사를 경영했으며
모친은 동일창극단원으로 명창 김소희와 함께 활동했던 창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광주 수창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 교동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김정호는
밥상위에 올라가 연설흉내를내는 등 웅변에 재능을 보여 여러 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머리좋고 활달한 개구쟁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때는 뇌염에 걸려 사지를 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대동중ㆍ상고 때는 인정많고 활달한 성격이 점차 말수가 줄고
어딘가 한이 맺힌듯한 인상으로 변해가며 고독을 즐겼다.

음악적 재능은 외가쪽의 영향이 지대했다. 모친과 함께 6ㆍ25동란중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외조부 박동신은 우리 국악의 거인. 명창 김소희의 고수이자
인간문화재인 김동준, 국립창극단장 박우성 등이 그의 제자이며 보국가,
유관순전, 해방가 등 판소리 창작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국립국악원 수석단원으로 아쟁을 연주했고 서울예전과 전남대 등에서
국악후진양성에 몰두한 박종선이 외삼촌이다. 생활처럼 들려왔던 외삼촌의
아쟁소리는 음악적 관심의 뿌리이자 시작이었다.
음악적 욕구가 꿈틀거리자 학업까지 포기하고 기타 배우기에 빠져들었다.

이때 찾아간 삼청동의 기타박사라 불리던 이생회 선생.
집을 뛰쳐나와 우이동에 골방을 얻어 두문불출하며 온종일 기타와 씨름을 했다.

당시는 통기타가 아닌 지미 핸드릭스, 산타나, 비틀즈 등 비트강한 록사운드에
관심이지대했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노력으로 곧 만만치 않은 기타주법으로
외국록그룹들의 레퍼토리를 제법 맛깔나게 연주할 만큼 진전이 빨랐다.

70년대초 김정호는 북한산속에서 임창제 등과 미8군에 출연하던 이상일을
음악스승으로 모시며 연주에 온 힘을 쏟았다. 임창제는 이 당시 김정호가 믿고
의지했던 절친한 음악의형제. 이들은 '음악과 결혼했다'고 할만큼
음악적 야망을 함께 키워갔다.

임창제는 “정호는우리가 다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보면 늘 기타를 끌어안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정좌한 자세로 열심히 기타를 치고 있던 작은 체구...
정말 악착스런 정신과 사랑을 가지고 연습하는 걸 보았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기타실력이 뒤진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극복하고 마는
완벽주의 스타일이다.

당시 북한산 등성이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공부도 많이 못해
무식한 우리가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을 한번 해보자'며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며 맹세하던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스킬보이스라는 록그룹을 결성하며 미8군 무대로 진출한 임창제가 이수영과 함께
듀엣 <어니언스>로 데뷔하려하자 자신의 일처럼 뛸 듯이 기뻐했던 김정호.
작곡한 노래들을 선물로 주었다. 어니언스의 데뷔앨범속에 수록된 김정호의 곡들은
두사람의 합의하에 임창제 이름으로 먼저 발표를 했다.

만약 히트를 하게 되면 그때가서 '이곡들은 김정호가 만든곡들'이라고 깜짝발표를 하고
'김정호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질 때 데뷔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의리있는 임창제는 대표곡 <작은새>외에도 <사랑의 진실> <외기러기>
<저별과 달을> 등 모든 곡들이 대히트를 하자 약속대로 KBS라디오방송에서
사실을 발표했다.

'김정호가 누구냐'는 대중들의 궁금증이 더해가면서 임창제의 손에 이끌려 73년
'이름모를 소녀'라는 데뷔곡으로 김정호는 대중들앞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를 풍미하며 지대한 음악적 영향력을 끼친 천재대중음악가의 등장이었다.

작은 가슴으로 큰 족적을 남긴 藝人





어니언스의 히트곡 <사랑의 진실> <작은 새>의 진짜 주인공이 밝혀지자
미8군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사월과 오월> 멤버로 잠시 활동을 하던 김정호는
TBC방송 신광철 PD에 의해 패티킴의 스페셜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미 전국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가수왕으로 등극하며 솔로데뷔를 꿈꾸던
조용필과 함께 김정호의 동반 게스트 초청은 파격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속에 두사람은 대중들속으로 탄탄한 첫발을 내딛었다.

우이동시절부터 김정호의 음악성을 인정해온 기독교방송 김진성PD는
데뷔곡 <이름모를 소녀>를 듣고 '한국의 모짜르트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이름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회한을 담은 노래.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은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점찍어 오랜
세월을 홀로 애태웠던 평생의 반려자였다. 자신의 일상적인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도 수차례 보내고 용기를 내 집으로 찾아갔다.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가 미덥지 못했다.

그러나 순수한 심성의 사촌오빠 후배가 싫지않았던 이영희. 74년 늦봄 쉘브르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타났다. 3년간의 열애후 77년 반포의 17평
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을 얻었다.
12번씩이나 이사를 거듭할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인기정상의 가수였건만 존경하던 신중현과의 첫만남에 감격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순수했던 김정호. 7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마초는 자신의 노래 '작은 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견디기 힘든 고행길을 걷게 했다.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무성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76년 10월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레스토랑을 맡겼다.
83년 재개발로 헐릴때까지 '꽃잎'은 유일한 노래무대였다.

김정호는 좌절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달중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혼에 불을 지폈다.

77년 방위소집으로 군복무를 마칠무렵 호되게 걸린 감기는 지병을 재발시켰다.
함께 활동이 금지된 하남석은 이 당시 둘도 없던 음악친구.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은 물론 국악리듬에 어쿼스틱 기타와 신디 사이저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을 함께 구상하기도 했다.

80년, 5년만에 대마초 망령에서 벗어난 김정호는 재기앨범
<인생-유니버셜,K-APPLE-893,80년3월>을 발표했지만 해금의 달콤함도 잠깐.
오랜 정신적 고통과의 싸움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심신 때문이었다.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했다. "과거의 화려했던 때는 흥미가 없다.
인기보다는 마음에 있는 좋은 노래를 불러 남기고 싶다"던 김정호.
일년이상 치료를 해야했건만 결핵균보다 더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은
4개월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오게 했다.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있던 뚜아에 무아 출신 이필원과 가까워지며
신디사이저로 창출하는 환상적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음악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오산의 금식기도원과 삼각산 산상기도에 매달리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님-아세아,83년11월>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배여있는 눈물겨운 음반이다.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아쟁,
가야금, 꽹과리를 직접 두둘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했다.

부인 이영희는 “신보제작은 뒷전이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다니며 1시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그 한스런 탄식의 이미지를
담은 노래가 <님>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예견한 상여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이었다.
머리가 쭈삣 서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님>은 그야말로 온몸을
불사른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또한 수록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요양원 시절 송도해변을 걷는
여인에게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를 뽑아낸 히트곡이다.
이 앨범은 숨쉬기조차 힘들어 5개월의 최장시간 녹음을 해야만 했던 그의 유작앨범이다.

85년 11월 29일 33세의 천재음악가 김정호는 50여곡의 주옥같은 곡을 남긴채
세상을 등졌다. 너무도 사랑했던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라는 애틋한
유언만을 남긴 그는 흰눈이 내리던 날 경기 고양의 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음악적 열정을
불태워 행복했던 진정한 대중음악가 김정호.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헌정음반과 편집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노래 <님>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부인을 여관에 드나드는 다방아가씨로...

김정호는 이복형제에게 핍박받고 무대에서 숨을 거두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제작,
재상영 금지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86년 10월 동료들에 의해 세워진 무덤앞
노래비에 새겨진 <하얀 나비>의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라는
노래구절처럼 인생을 구슬프게 노래한 그의 영혼은 <하얀나비>같이
그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의 곁에서 영원히 순백색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출처 : 블로그 > 월산이 방 | 글쓴이 : 일월산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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