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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불행한 여인 / 이승만의 첫째부인 '박승선'

peter홍 2020. 7. 30. 00:29

불행한 여인 / 이승만의 첫째 부인 박승선

이승만,

法的 婦人 '박승선'이 있는데도 프란체스카와 婚姻 申告하다.

 

 

 


이승만의 부인들 - 박승선,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













출처 : 김용삼 지음,

         『대한민국 건국의 기획자들』, p396~402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연은 일본의 만주 침략이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국제연맹은 일본의 만주 침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총회를 소집했다.
'김구' 주석이 이끄는 상해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입장을 대변할 전권대사로 이승만을 임명했다.

이승만은 이 회의를 위해 제네바에서 활동하던 도중
평생의 동지이자 아내가 된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너' (Franziska Donner - 1900-1992)양을 만나게 된다.

프란체스카는 1900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근교의 인 서스 돌프라는
소도시에서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성씨(姓氏)인 도너(Donner)는 동유럽 유대인들의 성으로,
프란체스카 여사가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비엔나에서 상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농산물 관리소에서 근무하다가 영국 스코틀랜드에 3년간 유학을 하여
영어 통역사 자격과 타자 및 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덕분에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영어와
불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20세 되던 1920년, 중매를 통해
당시 젊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자동차 경주 선수 '
헬무트 뵈링거'와 결혼했는데,
결혼식 직후 뵈링거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동안 사귀어왔던 동거녀가 있었던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프란체스카는 즉각 결혼을 취소하고
지참금까지 돌려받은 후 가업에 몰두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을 후계자로서 현장 수업을 받던 중
어머니와 함께 제네바로 여행을 갔다가
때마침 국제 연맹 회의 참석차
제네바를 방문한 이승만을 만났다.

당시 이승만은 돈이 없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날계란에 식초를 타서
마셔야 할 정도로 가난한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독립운동가였다.

두 사람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4년 10월 8일 뉴욕의 몽클레어 호텔에서
'존 헤인스 흠스' 박사와 '윤병구' 목사의 공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신혼 시절 내 꿈은 하루속히 한국이 독립되어

  고달픈 독립운동가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유명 정치인 집안과 친척인 것으로 밝혀졌다.
프란체스카 여사와 혈연관계인 유명 정치가는
에르빈 프뢸 북오스트리아 주(州의 주지사와 그의 조카이자 부총리를 역임한
'요제프 프뢸'이다. 보도 내용을 소개한다.

“오스트리아 4대 일간지 중 하나인「쿠리어」 지는
20088월 프란체스카의 집안 내력을 전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 커넥션’(Die Korea-Connection)이란 제목 아래
‘라트부른에서 서울로 : 족보 연구가가 '에르빈 프뢸'과 한국의 첫 퍼스트레이디 간의
관계를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가계도를 이들의 사진과 함께
게재했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67세인 프뢸 주지사는
오스트리아 정계 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로 통한다.
1992년 주지사로 선출된 뒤 6개주 중
가장 큰 북오스트리아 주를 21 년째 이끌고 있다.
오스트리아 사상 최장수 주지사다.
1968년생인 조카 요제프 프뢸은 200335세 때
농수산부 장관에 임명될 정도로
일찍이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다
2008년에는 여당인 국민당 당의장을
맡는 동시에
부총리 겸 재정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폐색전에 걸리는 바람에
2011년 공직에서 물러나
지금은 쉬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오스트리아의 유명 계보학자 펠릭스 군 다커가
한국의 독립 60주년을 계기로 프란체스카 여사의 족보를 추적한 끝에 알려졌다.
군 다커는 프란체스카의 고향인 인체르스도르프에 가서 오래된 출생기록
뒤지던 과정에서 문득 이 지역 유명 정치인인 프뢸 주지사와
혈연관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간 끝에 이들의 공동 조상을 찾을 수 있었다.

군 다커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공동 조상은
1753년 태어난 벤델린 도너라는 재단사인데, 프란체스카의 고조(高祖이자
프뢸 주지사의 5대조 할아버지로 판명 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체스카와 프뢸 주지사는 99 촌간인 셈이다.
벤델린 도너는 10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이들의 후손이
오스트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으로 추정됐다.

군 다커가 찾아낸 출생 기록에 따르면 1900615일 인체르스도르프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카는 보름 뒤인 71일 유아 세례를 받았다.
1869년 태어난 그의 어머니 프란체스카 게르 하르틀은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 후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해 두 사람 간의
적법한 자식이 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함께 일부 조상들의 직업도 밝혀졌다.
증조부 요제프 도너 역시
그의 아버지처럼 재단사였으며
목동, 목수, 포도주 제조업자, 방직업자 등

다른 조상들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프뢸 주지사의 경우 조상이 독일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됐다.
프뢸이란 성 자체가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라트부룬에서 일하는 에드문트 탄처라는 목사가 프뢸 주지사의 족보를
추적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프뢸 주지사가 60세 되는 해 ,
이 목사는 프뢸에게 그의 족보를 알려줬다고 한다.
하나 그때에는 프뢸 주지사와 프란체스카의 관계까지 규명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프뢸 주지사는 쿠리어지 와의 인터뷰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조상이 세계 정치에
참여했었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라며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과
오스트리아 간
경제 관계가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이승만도 프란체스카 도너 양과의 결혼이 재혼이었다.
이승만은 당시의 조혼 풍습에 따라 16세 되던 해에 우수현 근처에 살던
박춘겸의 딸 박승선과 혼인을 했다.
아내 박승선은 개성이 강하고, 당시로서는 학식도 갖춘 여인이었다.
이승만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부인 박 씨는 남편의 이름에서 ‘승’ 자를 따서
승선이라는 신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남편이 독립 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개혁을 부르짖을 무렵
아들 봉수(아명 태산)를 낳았다.



이승만과 함께 서당과 배재학당을 다녔던 신흥우의 기록에 의하면
박승선은 성격이 급하고 진보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체포되자
남편의 석방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사흘 밤낮을 덕수궁 앞에 꿇어앉아
탄원했다.
유영익은 부인 박 씨가 불같은 성격을 지닌 신식 여성으로서

성격이 남편과 너무 닮아 부부간의 금슬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이 출옥한 후 부인과의 사이에 깊은 금이 갔으며,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부부관계는 끝났다.
망명을 떠나기 직전 이승만은 친척에게 100원을 빌어 박 씨의 이혼 후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이승만의 일가인 우제하의 증언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10년에 귀국했을 때
부인 박 씨가
그동안 1,200평짜리 앵두 밭을
절에 시주한 것이 표면적인 동기라고 한다.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절에 앵두밭을 시주한 것에
격노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할 때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내에게 ‘다시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헤어지자’고 해서
사실상 이혼을 했다.

박승선은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후
기독교인이 되어 신학 공부를 하여

해주, 원산, 진남포, 평양 등지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다.
혼자 살기가 외로웠던지 양자를 들여 함께 살았다.

아들 봉수는 이승만이 미국에 데리고 갔는데
1906년 2월 25일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해방 후

이승만이 귀국하여 돈암장에 기거할 때 부인 박 씨가 돈암장으로 찾아와
두 사람이 만났으며 , 이승만은 박 씨 부인을 정중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당시의 조우 장면을 윤치영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돈암장으로 숙소를 옮기고 어수선한 가운데 질서를 잡아나가던
11월 중순 어느 날
나는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어느 노부인 한 사람이 나를 꼭 만나야겠다고 하여
직접 만나보았다.
그 노부인은 인품으로나 언사에서 바로 짐작되는 데가 있었다.

나는 노부인을 이 박사에게 안내했다. 나로서는 두 분의 만남을 지켜보며
남다른 인정의 기미를 헤아려 서로 간에 예절이나 태도에서 느낀 바가 많았다.
나는 이 박사의 뜻에 따라 정중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지만
그 뒤로 소식이 끊겨 지난 일이 되었다.'

평생 남편을 잊지 못했던 박 씨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재가를 하지 않고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남편이 외국 여성을 아내로 맞아 귀국하자 신설동에서 외로운 노년을 보내다가
1.4 후퇴 때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출처] 이승만의 부인들-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 박승선
 
         |작성자 이북도민 작가 이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