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禹長春), 1898년 4월 8일~1959년 8월 10일)은 일본 도쿄에서 출생,
명성황후를 윤간 및 시간하고 토막살인해 시신을 유기한 '우범선'의 아들이다.
생애 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건너왔으며,
아버지 우범선의 오류가 그에게 일평생토록 저주가 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살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조선인 '우범선'(禹範善)하고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 ナカ)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의 원한을 갚고자 했던 '고영근'에 의해 그의 아버지 우범선이 살해됐고,
과부가 된 그의 일본인 어머니는 '우장춘'을 잠시 보육원을 거쳐 사찰에 맡겼다.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에서 훈련대 대장을 역임하던 중 일본인 자객들과 함께
공모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으며, 그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우범선은 1903년 고영근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이후 보육원에서 잠시 지냈고
보육원 시절 일본 본토 원생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했는데
그 후 보육원을 거쳐 도쿄 회운사라는 사찰(寺刹)로 옮겨 회운사 주지승(아라이 선사),
그리고 동자승들하고는 비교적 돈독히 지내었으며 그 후 가내 사정이 완화되자
사찰을 떠나며 어머니의 손에 자라게 되었다.
1916년 4월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했다.
대학교를 나온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고원(雇員)으로 취직했고,
그를 아꼈던 데라오 박사의 도움으로 농사시험장 기수(技手)가 됐다.
1936년 5월 4일에는 그의 모교에서 "종(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창설한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에게 연구소의 운영을 부탁했고,
그는 1950년 3월 8일 대한민국에 귀국했다.
우장춘은 일본에 부인하고 자녀들을 일본에 남겨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을 믿지 못했고,
차라리 급기야는 그의 출국마저도 금지했는데, 그 까닭은 당시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그는 아직도 일본으로의 출국이 금지됐었기 때문에,
원예시험장의 강당에서 어머니의 위령제를 지냈으며,
그 당시에 전국 각지에서 보내진 조의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원예시험장에 물이 부족했던 탓에 '자유천'이라는 우물을 파내도록 하고 사용하게 하였다.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벼의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을 연구하였다.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농업과학협회에서 개발된
여러 작물 종자들을 보급하기 위해 홍보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일본인이며 기하라 히토시(木原 仁)가 1947년에 만들었다.
그런데 우장춘 박사는 이것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시연하였기 때문에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이인양 인식되기도 하였었다.
우장춘은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부문상을 받았다.
1958년 농림부 농사원 원예시험장 대표 수장이 되고,
1959년 안익태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의 연구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견학코스가 되기도 하였고
연구소에서는 늘 고무신 차림이었기에 '고무신 박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국에 온 지 9년이 되던 우장춘은 너무나 고된 일과를 보낸 탓에
1959년 8월 10일, 향년 62세의 나이로
그의 배우자 와타나베 고하루(한국명 우소춘)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만성 위 십이지장 궤양으로 국립의료원에서 고인이 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 농촌진흥청 내 여기산에 있으며,
2003년 4월 21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모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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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高永根, 1853년 ~ 1923년)은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개화파 정치인이며
함경도 매광감리, 종2품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관료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명성황후 암살 사건에 가담한 조선인 출신
제3대대장 직책을 지냈었던 '우범선'을 찾아가 암살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에 있다.
우범선 살해 을미사변 때 훈련대 병력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동참했던 당시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은
이후 일본에 망명하였는데, 그 후 '고영근'은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우연찮게도 대한제국 조선인 망명객 출신인 '윤효정'과 만나
명성황후 암살 사건 관련 담화 등을 밀담하였고
결국 1903년 11월 24일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에 소재했던 자신의 객저(집)로
우범선을 초대한 후 칼로 목과 턱을 찔러 우범선을 살해하였다.
그는 우범선 사살 후 바로 경찰에 자수하였다. 이 일로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영근은 고종의 선처 부탁으로 8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1911년 출소했다.
윤효정이 최고 단독 배후 조종한 "고영근의 우범선 암살 사건" 배경과
윤치호·민영기 등의 사건 추가 배후 관련 논란 등
지난날 그는 1899년 1월 8일에 친구인 윤치호에게 함경남도 원산부윤으로 임명되리라는 설이 돌았다.
1899년 1월 16일 오후 7시경 윤치호는 은밀히 일본인 집에 피신한 고영근의 행방을 알고 그를 찾아갔다.
윤치호를 만났던 고영근은 그에게 원산부윤직에 나갈 것이냐고 물었고,
윤치호가 대답을 주저하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부대신으로 승진한 것은 만민공동회 덕택이며,
윤웅렬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산에 가담했던 척신파 대신 민영기와의 친분관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고영근의 언급에 불쾌했으나 논쟁을 하면 감정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라 보고 언급을 회피하고 헤어졌다.
1911년 한국으로 돌아와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의 능참봉이 되어 무덤을 지켰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홍유릉을 돌보며 여생을 보냈다.
1923년, 향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개화 사상가 고영근은 개화 사상가로 무인이었지만 지식이 해박하여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며
민권운동과 계몽 강연 활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윤치호의 절친한 친구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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